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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 스프링캠프에서의 투구는 야구선수 구와타의 마지막 등판이었다.
GETTY IMAGES/ Multibits.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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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26일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한 이유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0시즌을 보냈다. 20년 동안 야구를 마음껏 즐겼다. 그리고 2006년 말 요미우리 유니폼을 벗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뭔가 납득이 되지 않는 게 있었다.
스무 살 때 메이저리그에서 던져 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그 꿈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미국 진출에 다시 도전했다.
지난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뛰었고 올해도 스프링캠프까지 치렀다. 1년 반가량 정말 즐기면서 뛰었다. 이젠 야구를 그만둬도 괜찮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개인 블로그에 은퇴를 결심한 날 오랫동안 목욕을 했다고 쓴 걸 읽었다. 어떤 마음이었나. 선수 생활을 천천히 돌이켜봤다. ‘그동안 수고했다. 곱게 씻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몸을 어루만졌다.
작은 키지만 야구를 오랫동안 하게 해 준 고마운 몸이다. 튼튼한 몸을 물려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 드렸다. 22년 동안 뛰면서 근육과 관절, 뼈를 너무 혹사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식을 치른 셈이다.
구와타 마스미는 22년 동안 어떤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구와타 마스미에게 정말 고맙다. 즐거웠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털끝만큼의 후회도 남아 있지 않다.
고교 시절 많은 기록을 세웠고 프로야구에서도 우승 했고 좋은 기록도 만들었다. 어렵고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나를 연마하면서 잘해 왔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비결이 있다면. 절제다. 트레이닝도 많이 했다. 내가 생각하는 절제는 이렇다. 몸에 좋지 않다는 걸 하지 말아야 한다. 탄산음료라면 보통 사람들이 세 잔 마실 때 나는 한 잔을 마신다. 담배는 열 개피를 피운다면 두 대다.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술이나 도박도 마찬가지다. 재충전할 수 있는 정도라면 좋다. 다행히 난 술이나 담배, 도박에 큰 관심이 없어 빠져 들지 않았다.
트레이닝 방식은. 훈련을 너무 많이 하지도, 적게 하지도 않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나는 몸이 큰 편이 아니다. 어느 한 부위만 집중적으로 단련해선 곤란하다.
야구선수는 던지고, 치고, 수비를 한다. 그에 맞는 근육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방향에서 훈련을 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키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야구를 잘할 수 있는 몸이 돼야 한다. 난 이걸 ‘공동 모금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모금 운동을 할 때 한두 명이 1억 엔이나 10억 엔을 내는 건 어렵다.
하지만 1억 명이 조금씩 내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야구 선수도 마찬가지다. 여기도 1, 저기도 1, 이런 식으로 여러 부위를 골고루 단련하면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트레이너가 집필한 <투수 어깨의 바이블(한화 이글스 조청희 트레이너가 1998년 번역)>에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트레이닝 기법에 대해 연구를 했나. 야구선수라면 몸을 단련하면서 정신적인 준비도 해야 한다. 운동을 잘해서 성적을 내고 몸값을 올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야구선수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니 만큼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
나는 역사, 지리, 해부학, 심리학, 영양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운동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 재활을 하는 선수는 몇 번이고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이때 ‘아, 지금 상태는 해부학적으로 어떻다’라는 지식이 있으면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어딘가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초가 있으니 재활 훈련을 할 때 적게 망설이게 된다. 지식은 운동의 기초다.
야구는 언제 시작했나. 야구공과 배트를 만진 건 두 살 때다. 선수로 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그때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오사카의 중학교에 진학한 뒤부터 투수로 뛰었다.
야구 명문인 PL학원고에 진학했다. 야구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규율이 엄격하다고 알고 있다. 굳이 엄격한 학교에 진학한 이유가 있었나. 중학교 1학년 때 이런 목표를 세웠다. PL학원고에 진학한 뒤 와세다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교진(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는다. 그 목표를 따른 것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PL학원고나 와세다대는 야구만 잘해서 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다. 중학 1학년 때부터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교진에서는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결국 와세다에는 가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와세다대학과 인연을 맺고 싶다.
고시엔 본선 통산 20승 기록을 세웠다. 어떤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첫 출전이던 1학년 여름 대회 준결승전이다. 당시 상대가 연속 우승을 노리던 이케다고교였다. 사실 1학년 때 야구를 그만두려 했다.
숙소 생활도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야구부원 가운데 내가 가장 작은 축이었다. 동기인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그때도 당당한 체격이었다. 기요하라를 보면서 ‘내가 이런 체구로 제대로 된 야구선수가 될 수 있을까’라는 회의를 가졌다.
어머니께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꿈을 쉽게 접는 건 너답지 않다. 구와타 마스미답게 살아라. 포기하지 말고 더 해 보거라”라고 하셨다. 나답게 다시 해 보자. 어머니 말씀을 듣고 그렇게 결심했다.
‘공동 모금의 법칙’도 그때 세운 것이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기요하라의 체격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이 아닌 구와타답게 몸을 만들기로 했다.
일본 고교 선수들에게 고시엔 대회는 어떤 의미인가. 공립학교든 사립학교든, 강한 팀이든 약한 팀이든 모든 고교 야구선수들의 꿈이 고시엔 출전이다. 나도 고교 야구선수 시절 고시엔 출전과 우승이 특별한 꿈이었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다 보니 고시엔에서 20승을 했고 우승도 두 번 했다.
피칭에 대해 묻고 싶다. 홈페이지 이름이 스페인어로 ‘마음의 투수(Pacheo de Corazon)’다. 2006년 11월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등판했을 때도 “내 야구는 마음의 야구”라고 했다. ‘마음의 야구’가 무엇인가. 일본 야구계에서 쓰는 말 가운데 ‘일구입혼(一球入魂)’이라는 게 있다. 공 하나하나에 혼을 담으라는 말이다. 나는 혼이 아니라 마음을 담으려 한다. 왜 마음인가. 야구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때론 위기가 있고, 때로는 기회가 온다. 혼자서는 위기를 넘을 수 없고 기회를 살릴 수도 없다. 늘 마음을 담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중요하다. 대충 놀면서도 1승을 따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을 담아 거두는 승리는 의미가 다르다. 야구장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당신과는 처음 만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니 성의 없게 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누구를 만나든 마음을 담아 이야기하고 싶다.
혼과 마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은 말 그대로 혼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마음은 정(情)과도 통한다. 애정, 우정, 인정의 그 정이다. 야구는 흔히 전쟁에 비유된다. 승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야구가 전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겨야 하는 게 전쟁이다. 야구에서는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상대가 없으면 야구 경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패한 상대를 경멸해서는 안 된다.
실수를 한 동료를 비난해서도 안 된다. 야구에 대해서는 애정, 동료에 대해서는 우정, 상대에 대해서는 인정을 가져야 한다.
가령 우리 팀 타자가 몸에 맞는 공에 당했다고 하자. 보복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보복은 상대를 맞추는 게 아니다. 상대를 아웃시키고 경기에서 이기는 게 더 낫지 않나.
고교 때는 어떤 투수였나. 직구와 커브 두 가지 공만 던졌다. 커브보다는 직구 구사율이 높았다. 슬라이더나 포크볼 등 다른 구종도 던질 줄은 알았지만 실전에선 쓰지 않았다.
내 꿈은 프로야구 에이스가 되는 것이었다. 슬라이더나 포크볼로 고교 상대들을 쉽게 잡긴 싫었다. 직구로 타자들을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작은 체구에도 강속구를 던졌다. 언제부터 공이 빨라졌나. 일본 고교 신입생들은 4월에 입학한다. 처음에 감독이 “넌 투수로는 실격”이라고 했다. 덩치가 워낙 작았기 때문이다.
대신 타격과 수비가 되고 어깨가 좋으니 외야수로 뛰어 보라고 했다. 5~6월에는 야수로만 뛰었다. 야구를 그만두려 한 시기가 그때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 여름 대회를 앞두고 공이 갑자기 빨라졌다. 공 끝에도 힘이 붙기 시작했다. 그 뒤론 줄곧 투수였다.
요미우리에 입단해 2년째에 15승을 거뒀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는데. 사실 1986년 첫 시즌을 마친 뒤 야구를 그만두려 했다. 루키 때는 고교 시절처럼 직구와 커브만 던져 댔다. 그러니 프로 선배들에게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 프로에선 도저히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한 고민이었다. 시즌이 끝난 뒤 구단에서 미국 애리조나에서 열린 가을 교육리그에 보냈다. 그때 그랜드캐년에 간 적이 있다.
장관이었다. 엄청난 대자연 앞에서 ‘은퇴를 하느냐 마느냐’하는 내 고민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때 머릿속에서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빨간색 오뚝이였다. 일본으로 돌아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된다. 그런 과정에서 힘이 쌓일 것이다. 이렇게 다짐하고 야구를 계속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왔다.
프로에 입단한 뒤 구종이나 투구 전술에 변화를 줬다면. 2년째 되던 해부터 슬라이더를 던졌다. 3년째부터 슈트(역회전 공)를 가다듬기 시작해 4년째부터 실전에서 던졌다. 5년째에는 포크볼을 연마해 6년째부터 던졌다. 그러니까 2년마다 새 구종을 하나씩 추가한 셈이다.
고교 시절부터 던지는 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많은 구종을 던지긴 싫었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서서히 구종을 늘리는 게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1991년 한일수퍼게임 때 포크볼이 인상적이었다. 기억 난다. 1차전이었다. 아마 그 경기에서 우수 선수로 뽑혔을 것이다. 1991년이면 본격적으로 포크볼을 던지기 시작한 해다.
1990년 한 경기에서 내야 땅볼 20개를 잡은 적이 있다. 그때 “이상적인 피칭은 타자 전원을 내야 땅볼로 잡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강속구 투수라면 삼진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 아닌가. 투수들은 타자와 상대할 때 이미지를 마음 속으로 그려 보게 마련이다. 내가 갖고 있는 투구 이미지 가운데 타자를 삼진으로 잡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고교 시절부터 그랬다. 투수 혼자 경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내야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타자를 처리해야 한다.
‘마음의 피칭’인가. 그런 셈인가(웃음).
1995년 6월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3루 플라이를 잡으려다 팔꿈치 인대를 다쳤다.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다친 것이다.
결국 팔꿈치 인대 재건 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 구위가 떨어졌는데. 토미 존 수술을 받은 뒤 공이 빨라지는 투수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 경우엔 역시 나이가 문제였던 것 같다. 수술을 받았을 때가 벌써 20대 후반이었다.
좀 더 어린 나이에 수술을 받았더라면 공이 빨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의 혹사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많이 던졌다.
고교 시절에는 고시엔 대회에서 4~5일 동안 연투를 했다. 몸을 혹사한 것이다. 그 탓인지 수술 뒤 이전 공의 위력을 되찾지 못했다.
부상에서 돌아온 뒤 2002년 15년 만에 방어율 타이틀을 땄다. 어떤 변화를 준 건가. 무술을 배웠다는 말도 들었다. 여러 가지를 다 해봤다. 1996년 재활을 하며 피아노도 배웠다. 손가락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고(古)무술을 배웠는데 전체적인 몸의 감각을 살리는 데 그만이다.
처음 무술을 배울 땐 상대방의 주먹이 무척 빠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련을 거듭하다 보니 주먹이 느리게 보였다. 사실 난 수비를 잘하는 투수다.
골드글러브도 여덟 번 탔다. 하지만 젊었을 때보다 선수 생활 후반기에 수비가 더 좋았다. 젊었을 때는 불규칙 바운드가 나오면 무의식 중에 몸을 사렸다. 하지만 선수 생활 후반기에는 한결 여유 있게 공을 처리했다.
기요하라 가즈히로와는 PL학원고 시절부터 인연이 깊다. 아마 기요하라는 올해를 끝으로 은퇴할 것이다. 영원히 선수로 뛸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 힘이 떨어진다. 그 친구가 은퇴 시즌을 멋있게 보냈으면 한다. 기요하라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구와타는 없었을 것이다.
고교 시절 기요하라는 위대한 타자였다. ‘저런 선수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여기를 던져야 하나, 아니면 저렇게 던져 볼까’라고 많은 고민을 했다. 기요하라가 아니었다면 나는 22년 동안 뛰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고맙다.
1985년 드래프트 때 요미우리가 기요하라 대신 와세다대 진학을 선언한 구와타를 지명한 건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그 이후 사이가 서먹하지 않았나. 한동안 그랬던 것도 사실이다. 기요하라가 나나 요미우리가 미웠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기요하라였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와 기요하라 사이에는 우정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기요하라가 1997년 프리에이전트(FA)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신인 시절 나와 기요하라 사이의 거리가 100이었다면 1997년에는 50 정도로 줄어들었다. 내가 요미우리에서 나올 무렵에는 5나 10 정도였다.
기요하라가 은퇴한다면 고교 시절 우정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자주 연락을 하고 얼굴도 가끔 본다. 기요하라의 얼굴에서 고교 시절의 웃음을 볼 수 있다.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배팅볼을 던져 주고 싶다고 했는데. 기요하라는 지난해 대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1군 복귀를 위해 2군에서 재활 훈련을 하고 있다. 곧바로 1군 투수들의 공을 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요하라가 복귀 준비가 됐을 때 프로의 직구를 던져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지금도 매일 훈련하고 있다. 친구의 재기를 돕고 싶다.
메이저리그 이야기를 해 보자. 1995년 노모 히데오가 LA 다저스에 입단했다. 미국 언론에서 ‘다음은 구와타’라고 했는데 입단 제의가 있었나. 오퍼가 있었다. 스무 살 때부터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의 포스팅 시스템 같은 명확한 해외 진출 규정이 없었다.
1995년에 팔꿈치도 다쳤다. 그리고 요미우리 구단에는 빚이 있다. 내가 사생활 문제로 난처했을 때 구단이 많은 도움을 줬다. 그 은혜를 갚아야 했다. 그래서 끝까지 남기로 했다.
미국에서는 어떤 투구를 했나. 미국으로 갈 시점에 나는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는 홀가분한 몸이었다. 어차피 미국에서 5년, 10년을 뛸 수는 없었다. 하루, 아니 단 1이닝을 던져도 좋았다. 스무 살 때의 꿈이 현실이 된다는 건 멋진 경험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스테로이드 복용에 대해 비난한 적이 있다. 금지약물 복용에 대한 생각은. 스포츠에는 스포츠맨십이 있어야 한다. 절대 편법이나 비겁한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
소년 야구팀을 운영하고 있다. 꽤 오래 됐다. 초등학생 야구팀을 4년 동안 운영했고 그 뒤 중학생 야구팀이 5년째다. 감독 겸 코치 겸 단장이라고 보면 된다.
지분을 갖고 있으니 구단주도 겸하는 셈이다. 나는 머지않아 프로야구로 돌아갈 사람이다. 소년야구팀은 작은 조직이지만 엄연한 야구팀이다.
앞으로 프로 지도자가 됐을 때 지금까지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초등학생 팀 다음에 중학생 팀을 운영한 건 작은 조직 다음에 조금 더 큰 조직으로 단계를 밟았다고 보면 된다.
나는 야구를 하며 자랐고 야구에서 부와 명예를 얻었다. 야구 팀 운영은 작으나마 일본야구에 대한 보답이다.
아들이 둘인데 야구를 하나. 장남 마사아키는 고교 1학년이다. 지난해까진 부자가 같은 팀에 있었지만 이젠 고교 야구부에 들어갔다. 포지션은 외야수다.
아들과 야구를 함께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둘째 마사시도 야구를 했지만 지금은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 야구선수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선수 생활을 하며 영광도 있었지만 고난도 있었다. 큰 부상도 당했고, 스캔들도 있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를 믿는다. 과거 어려웠던 일들은 하느님이 준 시련으로 생각한다.
팔꿈치 수술을 했을 때 힘들었다. 그러나 수술과 재활이 내겐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 매스컴과 관계도 좋지 않았지만 나를 단련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 경험을 했기에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경험이다. 몸으로 부딪쳐 봐야 뭐가 좋고, 뭐가 나쁜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매스컴에 두들겨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수술을 하지 않은 선수는 재활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승을 하지 못한 선수는 그 기쁨을 알 수 없다. 내가 지도자가 된다면 슬럼프에 빠진 선수에게 “왜 그렇게 태만한가”라고 다그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슬럼프를 겪어 봤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몸으로 느껴 보고 손으로 만져 봐야 이게 어떤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게 인생의 의의 아닐까.
SPORTS2.0 제 114호(발행일 7월28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