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나 인생에서 기회는 나비와 같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전준호는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18년 동안 어제와 같은 훈련을 오늘도 하고 있다 (사진=스포츠 춘추 박동희) |
로빈슨이 백인들만의 리그에 도전장을 냈다면 행크 아론은 백인들의 전설이었던 베이브 루스의 벽을 허문 도전자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론은 ‘부단한 반복훈련과 강인한 정신력’이란 전통적인 스포츠맨십을 통해 개인통산 755홈런을 기록한 위대한 타자다.
그런 아론이 1974년 베이브 루스의 714홈런을 앞질렀을 때다. 미국 전역의 인종주의자들이 그를 향해 엄청난 비난과 폭언을 쏟아냈다. 그 가운데는 진지하게 살해 협박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모욕적인 문구로 가득한 편지가 몇 만 통씩 집으로 전달됐기 때문에 아론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훗날 아론은 크게 낙담한 나머지 거실을 가득 메운 편지들을 ‘모두 벽난로에 던져버리려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론은 쥐었던 편지들을 벽난로 대신 다시 바닥에 내려놓아야만 했다. 협박과 모욕의 편지가 있다면 반대로 격려의 편지도 쇄도했기 때문이다.
어느날이었다. 연속해 몇 장의 협박 편지를 읽다 진이 빠진 아론이 마지막 편지를 쥐었을 때다. 한 타석이 끝날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론이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친애하는 아론 씨. 당신이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깼을 때 우리 가족은 병원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관전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 직후에 제 손자가 눈을 감았습니다. 8살의 나이로 말이지요. 믿기세요. 아론 씨? 그 아이 나이는 고작 8살에 불과했어요.
생전에 손자는 “우리 행크가 반드시 홈런을 칠거야”하고 말하곤 했답니다. 그리고 결국 당신이 715호 홈런을 날렸을 때 링거 바늘이 꽂힌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을 치켜 들며 텔레비전을 향해 외쳤어요.
“할아버지, 아빠. 해냈어요! 제가 그랬죠. 행크는 반드시 해낼 거라고요.”
손자는 백혈병과 암으로 무척 고생을 하고 있었답니다. 당신이 손자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셨는지 꼭 전하고 싶어 이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손자가 병원 침대에서 사슴처럼 펄쩍 뛰며 외쳤던 걸 당신이 보셨다면 좋았을 거예요. 병원 3층에 있던 이들은 모두 그 아이의 외침을 들었으니까요. 손자는 당신의 홈런을 자신의 일처럼 뿌듯해 했습니다. 아론 씨. 우리 모두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손자에게 당신의 홈런 신기록을 볼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고마워요. 행크.’
스포츠 스타의 행동과 말은 그것이 설령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다른 이에게 큰 영향을 주고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롯데 정수근 사건이 단순 음주폭행사건으로 끝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와 같은 의미로 엄청난 노력과 땀으로 일군 스포츠 스타의 값진 성과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꿈과 용기로 작용한다. 히어로즈 전준호가 그렇다.
![]() 전준호가 2루타를 치고 3루를 향해 달리고 있다(사진=우리 히어로즈) |
전준호는 2006년 9월 광주 KIA전에 이어 지난해 7월 13일 수원 삼성전에서 홈런을 기록한 뒤 다시 1년 만인 7월 29일 목동 한화전에서 홈런을 기록했다. 프로통산 18년 동안 42호째 홈런이었다.
이날 전준호의 홈런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동계훈련 부족에 따른 여름철 체력저하로 페이스가 점점 내리막을 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본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지 “팀에 폐를 끼치면 안 되는데…”하며 아쉬움을 토해내곤 했다.
사실 전준호에게 2008시즌은 프로 18년 동안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임에 틀림없다. 지난해 2억5천만 원이던 연봉이 올시즌 무려 72%(7천만 원)나 깎인 데다 스프링캠프도 제주도에서 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구단이 정상화되기 전에는 선수 대표로 구단 대표들과 얼굴을 붉히는 위치에 서야만 했고 그로 인해 마음고생도 심했다.
그럼에도 전준호는 한 번도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시즌 초반 2군에 머물렀을 때는 “역량이 부족해서”라는 말로 스스로를 탓했고 1군에 올라와서는 “후배들을 희생시키면서 타석에 서고 싶지 않다”는 말로 당당히 주전경쟁을 선언했다.
그리고 결국 해냈다. 올시즌 79경기에 출전해 89안타 타율 3할3푼4리, 출루율 4할2리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타율은 김현수(두산)에 이어 리그 2위 출루율은 6위다. 이대로라면 2002년 이후 8년 만에 타율 3할에 복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안타 10개만 더하면 양준혁(삼성)에 이어 역대 2번째 2천 안타 고지에 오르는 선수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할 게 있다. 4월 17일 청주구장에서 전준호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당시 전준호는 2군에서 복귀해 간간히 대타로 출전하고 있었다. 그때 관중으로 보이는 2명의 야구팬이 다가와 정중히 사인을 요청했다. 공교롭게도 1명은 전준호의 이름과 등번호가 새겨진 구(舊)롯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전준호는 대형할인매장의 직원처럼 매우 상냥한 태도로 사인에 임했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팬과 전준호가 잠시 이야기를 나눌 무렵. 옆에 있던 다른 일행이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스포츠춘추>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대학은 청주에서 다니지만 저 친구 고향이 원래 부산이거든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롯데광팬이었는데 전준호 선수를 유달리 좋아하셨대요. 그래서 지금도 야구장에 올 때면 항상 롯데 유니폼을 입고 다녀요. 일전에 사직구장에서 볼 때는 자기 혼자 갔는데 표를 2장 샀다고 하더라고요. 2장을….”
어쩌면 그 야구팬 앞에 서 있는 건 전준호가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받은 건 사인이 아니라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안부인사였는지 모를 일이다. 야구란 그리고 인생이란 결국 그런 것이니까.
전준호도 그에게서 사연을 들은 것일까. 다음날 시작된 목동 롯데 3연전부터 폭발적인 타력을 선보이며 과거의 전준호로 돌아갔다.
중학교 2학년 딸과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베테랑 전준호는 그를 응원하는 무수히 많은 팬들을 위해서라도 내일을 향해 뛸 것이다. 그것이 야구가 그에게 내린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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